카스트라토 레퍼토리와 현대 성악 해석의 문제점
카스트라토는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논쟁적인 성악 성부였습니다. 그들이 부른 아리아는 화려함과 기교, 감정의 절정을 담고 있었지만, 그 음색은 신체적 희생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카스트라토가 남긴 수많은 레퍼토리를 듣고, 연주하고, 연구하지만, 이 음악이 온전히 예술로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카스트라토가 존재했던 시대에는 이들이 무대를 장악하고, 작곡가들은 그들을 위해 특별히 아리아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들이 남긴 레퍼토리는 살아남았지만, 그 소리를 구현할 ‘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성악가들은 이 유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고음만 따라 부르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음악은 재창조되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카스트라토 레퍼토리의 음악적 특성과 그것을 현대 무대에서 해석할 때 마주치는 예술적, 윤리적, 실천적 문제들을 분석합니다. 카스트라토의 음악을 단순히 ‘역사적 작품’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지닌 기억과 의미를 함께 해석하는 방식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카스트라토 레퍼토리의 구조와 성악 음악적 특징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된 음악은 대부분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 사이, 이탈리아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이 시기의 아리아는 카스트라토의 발성과 기교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성을 가집니다.
1. 고음역과 넓은 음역 폭
카스트라토는 소프라노 또는 알토 음역을 유지하면서도, 테너나 바리톤보다 더 넓은 음역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레퍼토리는 C4에서 G5 또는 그 이상까지를 아우르며, 때로는 두 옥타브를 넘는 멜로디를 포함합니다.
2. 극단적 장식 기법의 사용
트릴, 모르덴트, 아첸투스, 빠른 스케일, 아르페지오, 스타카토 반복 등 바로크 양식의 장식 기법이 극단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카스트라토들은 이를 활용해 청중의 탄성을 유도하는 무대 장악력을 발휘했습니다.
3.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 중심
A-B-A′ 형식의 다 카포 아리아는 감정의 구조화뿐만 아니라, 재현 구간에서 카스트라토가 개인의 해석과 장식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이 구간은 즉흥적 변주가 허용된 해석의 절정이었습니다.
4. 감정 표현의 외면성과 과장성
카스트라토는 기교와 감정 표현을 과장되게 드러냄으로써 무대 위 인물의 감정과 음악의 긴장감을 과도하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아리아는 표현의 폭과 밀도가 매우 높습니다.
현대 성악가가 마주치는 해석의 난점과 현실
오늘날 이 레퍼토리는 대체로 여성 성악가(메조소프라노, 콘트랄토) 혹은 남성 카운터테너에 의해 소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카스트라토가 남긴 아리아를 연주할 때, 단순히 악보만 재현한다고 해서 본질을 구현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은 그들이 마주하는 핵심적인 난점들입니다.
1. 음색 차이에서 오는 감정 밀도의 손실
카스트라토의 음색은 단순히 고음이 아닌, 남성적인 폐용량과 공명 공간 위에 형성된 고음의 밀도였습니다. 반면 현대 성악가들의 음색은 카스트라토의 물리적 구조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음악이 요구하는 긴장감이나 공명 밀도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장식 해석의 기준 부재
바로크 시대에는 카스트라토가 스스로 장식을 해석하고 삽입했지만, 현대 성악가들은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한 변형인지, 어떤 장식이 당시 스타일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합니다. 이는 특히 즉흥성과 해석의 자유가 줄어든 현대 공연 문화 속에서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3. 젠더 정체성과 배역 해석 문제
많은 카스트라토 아리아는 남성 배역(왕, 장군, 영웅 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 성악가가 이 배역을 소화할 경우, 시각적-성별적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카운터테너가 연기할 경우에도 신체적 이미지와 고음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해석의 일관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4. 윤리적 거리두기의 딜레마
카스트라토의 음악을 해석하면서, 그들이 거세된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희생’을 상기시키는 연출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존재합니다.
성악 문헌 『The Castrato and His Wife』(H. Berry)는 “이들의 음악은 단지 미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조건과 권력의 상징으로 읽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해석은 발성이 아니라 기억의 기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술적 재현인가? 역사적 복원인가?
카스트라토 레퍼토리를 다룰 때, 성악가와 연출가, 청중 모두가 마주하는 근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음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1. 예술적 해석으로의 접근
이 접근은 카스트라토의 존재보다는 작품 자체의 음악성과 감정 구조에 초점을 둡니다. 이 경우, 여성 성악가의 연기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카스트라토의 역사적 조건은 배경 정보에 머무릅니다.
- 장점: 음악적 완성도에 집중 가능
- 단점: 역사적 맥락의 소외, 과거의 맹목적 미화 가능성
2. 역사적 복원으로의 접근
이 방식은 카스트라토의 실제 음색과 역할을 최대한 복원하려는 시도입니다. 카운터테너를 기용하고, 당대의 장식 해석과 악기 편성을 복원해 원형에 가까운 공연을 시도합니다.
- 장점: 음악사적 의의 강조, 해석의 교육적 가치
- 단점: 물리적 한계와 음색 차이, 카스트라토의 비인간적 배경의 미화 우려
결국 가장 설득력 있는 방향은 음악과 역사, 감정과 비판이 균형 있게 공존하는 해석이며, 이는 교육자와 연출자, 성악가의 공동 작업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날의 카스트라토 아리아 교육과 공연의 방향성
현대 음악 교육과 공연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카스트라토 레퍼토리를 실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실천 전략 예시
- 바로크 장식 교육 병행
레퍼토리를 부르기 전, 각 장식 기법의 구조와 의미를 교육하고, 이를 즉흥적 장식에 활용하는 훈련을 병행합니다. - 역사적 맥락 설명 포함
공연 전 해설이나 교육 콘텐츠를 통해 카스트라토의 역사와 음악적 특징을 간략히 안내함으로써, 청중이 단순한 소리 이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해석 다양성 인정
여성, 남성, 카운터테너, 콘트랄토 등 다양한 성부가 해석에 참여할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에 개별적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 창작적 응용 시도
현대 작곡가들이 카스트라토 레퍼토리를 변형하거나, 그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작품을 쓰는 시도도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와 예술의 창의적 대화를 열어줍니다.
카스트라토 레퍼토리는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임과 동시에, 복잡한 역사적 기억을 품고 있는 유산입니다. 현대 성악가들은 이 음악을 단순히 고음을 부르는 기교적 도전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인간, 감정, 윤리까지 함께 고려하며 해석해야 합니다. 진정한 해석은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지금 이 무대에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본 글은『The Castrato and His Wife』(Helen Berry, 2011), 『Castrato: Reflections on Natures and Names』(Martha Feldman, 2015)를 일부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