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사에서 가장 극단적이며 복합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성부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카스트라토(Castrato)일 것입니다. 이들은 변성기를 거치기 전에 거세되어 고음역을 유지한 채 성장한 남성 성악가들로, 바로크 시대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풍미한 실질적인 스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소프라노나 알토보다 힘차고, 남성 테너보다 유연하며, 여성이 낼 수 없는 독특한 음색으로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무대 뒤에는 신체적 희생, 사회적 통제, 음악적 이상주의가 교차하는 어두운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카스트라토는 단지 뛰어난 고음역 성악가가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의 산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음악은 카운터테너나 여성 성악가에 의해 재현되고 있지만, 그 존재 자체는 역사 속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카스트라토의 기원과 역사, 음악적 위상, 그리고 윤리적 논란까지 포함하여, 단순한 음악사가 아닌 인간과 사회, 권력과 예술이 얽힌 복합적 구조를 성악의 시선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화려한 극장 무대 이면의 침묵과 희생, 그리고 예술적 명성을 둘러싼 긴장과 모순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카스트라토의 기원과 제도적 구조
카스트라토는 단순히 개인적인 희생이 아니라, 제도화된 음악 시스템 속에서 선택되고 길러진 구조적 현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8세 전후의 남자아이들이었으며, 음악적 재능이 보일 경우 부모나 후견인에 의해 거세되어 전문 성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왜 카스트라토가 필요했는가?
- 여성 금지와 고음 수요의 충돌
16~17세기 교회 음악에서는 여성의 참여가 금지되었고, 동시에 고음 성부는 다성 음악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음을 유지시킨 남성 성악가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 극장 오페라의 고음 선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바로크 오페라에서는 감정의 과장과 기교적 전시가 중시되었고, 높은 음역의 화려한 아리아가 인기 요소였습니다. 카스트라토는 이 요구를 완벽히 충족시킨 존재였습니다. - 물리적 장점
변성기를 거치지 않음으로써 성대는 짧고 얇은 상태를 유지하고, 성인은 된 신체에서는 폐활량과 공명 공간이 커져 강하고 넓은 고음을 낼 수 있는 구조적 장점을 가지게 됩니다.
교육과 양성 시스템
이들은 거세 이후, 주로 교회나 귀족이 운영하는 음악학교(Scuola di musica)에서 집중 교육을 받았으며, 매우 엄격한 훈련과 고음 기술, 음악 이론, 종교적 감화까지 병행되었습니다. 로마, 나폴리, 볼로냐는 카스트라토의 중심 양성지였으며, 이탈리아는 거의 국가 단위로 카스트라토 시스템을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카스트라토를 단순한 성악가가 아니라, 국가적 문화산업의 핵심 자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카스트라토의 음악적 영향과 성악 무대 위상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카스트라토는 성악계의 주역이자 오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남성보다 높은 음역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여성보다 더 강력한 발성과 테크닉을 구사해 무대에서 가장 극적인 감정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주요 음악가와 작품에서의 카스트라토
- 헨델
헨델의 수많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에는 카스트라토를 위한 아리아가 등장합니다. 특히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의 ‘V’adoro pupille’는 카스트라토의 표현력을 전제로 구성된 대표 아리아입니다. - 비발디
비발디 역시 다수의 종교 작품에서 카스트라토 성부를 사용했으며, 그들의 음역을 감정의 정점으로 활용했습니다. - 보논치니, 포르포라, 하세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 역시 카스트라토의 등장으로 과장된 기교와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곡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스타 시스템과 문화 현상
카스트라토는 단순한 성악가가 아니라 오늘날의 팝 스타에 버금가는 사회적 인기를 누린 존재였습니다. 파리, 런던, 비엔나 등의 주요 도시에서 이들은 오페라 하우스의 흥행 보증 수표였으며, 화려한 의상, 개인 악보, 팬 문화까지 형성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파리의 새’라 불린 파리넬리(Farinelli)가 사회적 열풍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개인의 희생, 인권 침해, 성적 대상화 등 무거운 그림자가 함께 존재했습니다.
카스트라토의 몰락과 윤리적 재조명
18세기 후반부터, 계몽주의와 인권 의식의 확산으로 카스트라토 제도는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거세를 통한 음악 훈련이 비인간적이라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점차 사회적 지지를 잃게 됩니다.
교황청의 변화
1878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가대에서의 카스트라토 채용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후 1903년 교황 비오 10세는 시스티나 성가대에서 카스트라토 성악가의 참여를 공식적으로 금지합니다. 이로써 300년 넘게 지속되었던 카스트라토의 공식적 활동은 종결됩니다.
마지막 카스트라토
역사상 마지막 카스트라토로 알려진 인물은 알레산드로 모르시치에르(Alessandro Moreschi)로, 그는 시스티나 성가대에서 활동했으며 1902년에 녹음된 그의 음성은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카스트라토의 실제 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어딘가 애잔하고, 역사 속에서 단절된 예술을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 음악에서의 해석과 역사적 접근
오늘날 카스트라토를 위한 작품은 대부분 여성 메조소프라노나 카운터테너가 소화합니다. 이는 원전 연주 운동의 흐름 속에서, 당시의 음역과 해석을 최대한 복원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해석상 갈등과 윤리적 고려
일부 음악학자는 현대 무대에서 카스트라토 아리아를 반복 공연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 폭력의 미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반면, 이들을 예술의 희생자이자 선구자로 기리는 목소리도 존재합니다.
현대 성악가들이 카스트라토 레퍼토리를 해석할 때는 단순한 고음 재현보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의 긴장, 테크닉의 절제, 그리고 잊힌 인물들의 존재성 회복이라는 해석적 태도를 함께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카스트라토는 음악적 혁신과 동시에 인권 침해의 이면을 품고 있는 복잡한 역사적 존재입니다. 이들은 한때 오페라의 중심에 섰고, 고음역의 새로운 예술적 미학을 창조했지만, 그 과정은 제도적 희생과 윤리적 갈등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작품은 다른 성부를 통해 재해석되고 있으며, 단순한 복원이 아닌 역사의 반성과 예술의 성찰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 본 글은『Castrato: Reflections on Natures and Names』(Martha Feldman, 2015), 『The Castrato and His Wife』(Helen Berry, 2011)를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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